신간안내   

천년의 길

소수출판사_이기봉

16,000원

제목: 천년의 길

부제: 남한강길·강화길·의주길을 가다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총서명: 지락재 01

 

판형: 153×225

장정: 무선철

쪽수: 256쪽

값: 16,000원

발행: 2016년 12월 15일

ISBN: 979-11-87312-04-8 03910

979-11-87312-05-5(세트)

분류:

1차 분류는 답사 여행,

2차 분류는 지리

 

 

<개요-책 소개>========================================================

무심히 걷던 길 위에 담긴 특별한 이야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천 년, 2천 년 전의 길과 지금의 길은 얼마나 다를까? 남한강길, 강화 바닷길, 의주길을 통해 민초들의 삶의 터전이었지만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물길(강길, 바닷길)과 땅길을 따라가며 그 삶과 길이 담고 있는 이야기, 역사문화유적을 살핀다. 천년의 길이 일제강점기, 한강종합개발 시대에 급변하는 모습, 민초들이 부르던 우리말 땅이름과 그것이 잊히게 된 과정을 알아본다. 소수출판사의 ‘지락재’ 첫 번째 도서.

 

<저자 소개>==========================================================

지은이 이기봉(李起鳳)

1967년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서 태어났다. 수원 수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지리학과에서 공부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부터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9년부터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며 역사 지리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고대 도시 경주의 탄생』 『지리학 교실』 『조선의 도시, 권위와 상징의 공간』 『평민 김정호의 꿈』 『조선의 지도 천재들』 『근대를 들어 올린 거인 김정호』 『땅과 사람을 담은 우리 옛 지도』 『슬픈 우리 땅이름』 외에 다수의 저서가 있다.

 

<차례>==============================================================

 

글머리에-길 위에서 길을 묻다

길을 떠나기 전에-옛사람들의 길 찾기

 

1부 충주의 목계에서 강배 타고 서울 가기

목계나루, 남한강 큰 강배의 출발지

모래섬을 돌아 마구 흐르는 막흐르기여울

청룡나루에서 흥원창까지

--남한강길에서 만나는 법천사터

흔바위나루, 장호원으로 가는 최단 코스

여주목 옛 지도 속의 절경, 여주 팔경

배개나루, 이중환이 극찬한 마을

여울목에서 칡미나루까지

한여울과 대한민국

강길로 서울의 입구에 이르다

뱃사공과 떼꾼의 종착지, 서울

--정조의 행궁, 용양봉저정

 

2부 인천 앞바다에서 바닷배 타고 서울 가기

손돌목, 뱃사공의 충정이 깃든 염하

--강화길에서 만나는 광성보와 용두돈대

--덕포진의 포대와 산책길

비스듬히 배를 띄웠던 갑구지나루

천혜의 요새, 강화도

--『고려사』에 기록된 강화도의 대몽 항쟁

--『고려사』에 기록된 왜구의 강화 침략

--청나라의 강화도 함락에 대한 『인조실록』의 기록

머머리섬에서 오도잣까지

--월곶진과 월곶돈대

행주산성, 12:1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행주산성 전투

바닷길로부터 서울에 이르다

 

3부 사신 행렬이 오가던 의주길

땅 위의 길을 나서며

--『대동지지』 제27권 「정리고」

임진나루, 서울 가는 안전한 최단 코스

고랑개나루, 태조 왕건이 놀던 곳

--신라 마지막 임금의 무덤, 경순 왕릉

칠중성, 전략적 요충지의 통치 성

화석정, 밤골의 자연정원

--율곡 선생 묘와 자운서원

임진나루에서 용미리석불입상까지

혜음원, 혜음고개의 국영 숙박시설

벽제관, 고양 고을의 객사

숫돌고개, 명나라군이 왜군에게 대패한 곳

--『선조실록』에 기록된 숫돌고개 전투

서울의 경계, 검바위참에서 떡전거리까지

의주길의 끝이자 출발점, 돈의문터 앞에서

 

<출판사 서평>=========================================================

 

주목받지 못한 길을 돌아보다

강이 삶의 터전이었던 뱃사공과 떼꾼들의 진한 흔적이 배어 있는 나루와 여울 등은 유명한 역사 인물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해 하나하나 사라졌고 지금도 사라져 가고 있다. 그들이 늘 불렀던 우리말 땅이름, 힘겹게 오르내리며 사투를 벌였던 여울, 배를 정박해 짐을 싣고 내리며 목을 축이고 까만 밤 잠을 청했던 나루도 우리의 길의 역사다. 그 길을 따라가는 수준 높은 여행을 시작한다.

 

옛사람들은, 모르는 길을 어떻게 찾아갔을까? 지금처럼 지도를 사용했을까?

옛사람들은 ‘정리표’ 또는 ‘도리표’라는 길 안내 책을 가지고 먼 길을 나섰다. 고개, 나루, 역원, 술막 등을 10~40리의 간격으로 기록해 놓아, 이것만 참조하면 전혀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런 『정리표』『도리표』에는 7개의 줄기길과 2개의 가지길이 표로 정리돼 있는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길, 가장 중요했던 길은 무엇이었을까? 문명과 국가의 탄생에서 비롯된 이런 길 안내 자료는 어떻게 작성되었을까?

 

충주의 목계에서 강배 저어 가기

남한강 큰 강배가 출발하는 목계나루에서부터 서울의 용산나루, 삼개나루로 배를 저어 가보자. 호수같이 잔잔한 물살과 위험천만한 거친 물살을 두루 헤쳐나가던 옛날 뱃사공들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칡미나루에서 잠시 정신을 가다듬다가 남한강에서 가장 무서웠던 한여울에 이르면 잔뜩 긴장해 정신없이 키를 돌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진정 어린 삶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팔당댐과 이포보의 건설로 잠겨버린 나루와 여울들,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로 사라진 당젱이섬의 당젱이나루를 비롯한 나루들을 거쳐 서울의 경계인 광나루, 지금 석촌호수로 남아 있는 송파나루와 삼밭나루에 이른다.

서울 도성 안까지 최단 코스로 건네주는 두뭇개나루, 한남대교의 한강나루, 반포대교의 서빙고나루, 동작대교의 동재기나루, 한강대교의 노들나루를 거쳤고, 세곡을 실은 배는 용산에, 그렇지 않은 경우엔 삼개(지금의 마포)에 정박했다. 삼개는 소금, 젓갈, 각종 해산물을 실은 바닷배까지 모이던 가장 번성한 나루였다.

 

똥을 싸 놓은 것같이 작은 산?

‘똥뫼’가 발음하기 쉽게 변한 것인 ‘동매산’과 전국적으로 흔히 쓰이는 이름 ‘동산(東山)’의 유래가 바로 이것이다.

한강은 100년 전에도 ‘한강’으로 불렸을까? 복여울나루, 인다락나루, 덕은이나루, 솔미나루, 좀재나루, 개치나루, 창나미나루.... 이처럼 어여쁜 이름을 가진 나루들이 강길, 바닷길처럼 잊히고 있다.

천 년 이상 불렸던 우리말 땅이름이 일제강점기에 정비될 때 한자로 표기되었고, 여기에 표기된 한자의 소리로만 읽는 우리의 습성이 더해져서 우리는 우리말 땅이름을 잊게 되었다. 전국에서 가장 번성했던 삼개(마포)까지, 표기된 한자의 소리로 부르고 있으니 안타깝다.

 

밀물과 썰물의 주기를 계산하며 바닷배 타고 가기

강배와 바닷배는 어떻게 다를까? 강길과 바닷길은 어떻게 다를까?

‘짠 바닷물이 흐르는 물’이라는 뜻의 염하로부터 출발해본다.

사납게 흐르는 바닷물 때문에 밀물과 썰물의 주기와 흐름을 잘 타고 건너야만 한다. 뱃사람도 무서워할 만큼 위험했고 이국적이기까지 하지만 고려시대 뱃사공의 충정이 깃든 손돌목, 강화도와 김포 사이 나루에서 가장 붐볐고 강화읍과 서울을 오가는 사람들을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건네주던 갑구지나루를 지난다.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이면서도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에게 함락되는 역사를 살핀다. 비무장지대에서 한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인 머머리섬, 한강과 임진강으로 갈라지는 오두산성(오도잣) 앞, 임진왜란 때 왜군과 12:1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테뫼식의 행주산성을 둘러보고 웅어잡이가 성행했던 행주나루를 지난다. 구멍바위나루, 난지도를 지나 병인양요 때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양화나루에 이르고 밤섬을 지난다. 역할을 다한 바닷배는 세곡을 실은 경우엔 용산나루에, 아니면 삼개에 정박했다.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먼 길을 돌아서 가다

사신 행렬이 오가는 길로서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의주길. 그중 대한민국에 속한 마지막 부분인 널문이술막(판문점)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해본다.

가장 빠른 길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해야 했던 옛날에, 임진강을 건너려면 지금의 통일대교 쪽이 아니라 임진나루로 건넜다. 고려 태조 왕건이 놀던 곳으로 화신백화점 분점까지 들어섰을 정도로 번화했던 고랑개나루, 고구려 성인 호로고루성을 살핀다.

삼국시대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했던 칠중성에서 필부와 비삽의 이야기를 되새겨본다. 밤골의 화석정에서는 시골 출신이 벼슬하는 세계사적으로 특이한 현상과 자연정원에 대해 생각해본다.

고려시대 불상인 용미리석불입상, 고려 때 국영 숙박시설로 번성했던 혜음원, 고양 고을의 객사였던 벽제관, 승승장구하던 명나라군이 왜군에게 대패했던 숫돌고개를 지난다. 박석고개, 인조 임금이 강화도로 출발하려 할 때 최명길이 청나라 군대와 담판을 벌였던 양처리벌, 녹번이고개, 떡전거리, 무악재를 지난다. 독립문역 사거리 영은문에서는 사대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고, 마지막으로 돈의문에 이른다.

 

길 위의 만남―주춧돌에서 역사와 문화를 읽다

강길로 바닷길로 의주길로 서울을 가며 길의 역사를 살피는 중간중간에, 주변의 숱한 유적지를 둘러본다. 『고려사』 『인조실록』 『선조실록』의 전쟁 기록을 살피고 통일신라·고려·조선의 조각상과 주춧돌이 어떻게 다른지, 우리나라의 정원은 다른 나라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본다.

 

 

<책 속으로>==========================================================

 

“(……) 저기 양평의 한여울을 내려가는데, 고개를 살짝 들어봤더니, 사공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거야. ‘죽기 싫으면 고개 숙여!’ 하고. 어휴! …… 선참은 앞에서 ‘좌! 우! 좌좌 …… 아니 우우!’ 소리를 벅벅 지르고 쫄따구는 뒤에서 정신없이 키를 돌려요. 여울 내려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던지, 그래서 선참은 말을 최대한 짧게 하며 소리 질렀던 거야.”

―<모래섬을 돌아 마구 흐르는 막흐르기여울> 28쪽

 

100여 년 전으로 돌아가면, 한자로 표기한 행정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지역 주민들은 거의 모두 우리말 땅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한자의 뜻과 소리를 따서 우리말 땅이름을 표기했음에도, 표기된 한자의 소리로만 읽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관 때문에 우리말 땅이름으로 불리는 행정리나 행정동의 이름을 거의 찾을 수 없게 되었다. 2014년 도로명주소로 바뀌면서 일부 우리말 땅이름이 살아났지만, 그래도 한자의 소리로만 읽는 땅이름이 다수를 차지한다. 아마 인류의 문명사에서 이렇게 빨리, 그리고 이렇게 대규모로 땅이름의 소리가 순식간에 변한 경우는 찾기 어려울 정도로 초유의 사건이 아닌가 한다.

―<흔바위나루, 장호원으로 가는 최단 코스> 44쪽

 

일제강점기 이후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유적의 이름을 지을 때, 표기된 한자의 소리에 따라 부른 행정 마을의 이름을 따와서 붙였다. 그것이 역사책에 수록되었기 때문에 우리말 땅이름이 아주 많이 사라졌다.

―<뱃사공과 떼꾼의 종착지, 서울> 92쪽

 

아마 화석정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것이 파평면의 율곡리에 있다는 안내 푯말을 보고서는 율곡 이이 선생이 살아서 이 마을의 이름이 율곡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이다. (중략) 아쉽게도 당시 불리던 우리말 이름의 소리인 밤골이 아니라 표기된 한자의 소리인 율곡으로 부른 것이고, 이이 선생은 자신의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지은 것이다.

―<화석정, 밤골의 자연정원> 206쪽

 

현재까지 볼 수 있는 조선의 유적이나 유물 중에서 벽제관에서 사용했던 것처럼 잘 다듬은 주춧돌과 축대는 궁궐과 종묘·사직단·성균관, 왕릉 등에서만 볼 수 있다. 벽제관터에 가서 이렇게 잘 다듬은 주춧돌과 축대에 주목해야 높은 수준의 답사 여행을 했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벽제관, 고양 고을의 객사> 231쪽

 

사대주의는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중략) 사대주의만이 아니라 ‘주의’라는 것이 붙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역사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어떤 생각이나 관념도 절대화되는 순간, 유연성을 상실하여 결국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고 뒤처지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의주길의 영은문터와 모화관터를 지날 때 지금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는가 한 번쯤 되물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의주길의 끝이자 출발점, 돈의문터 앞에서> 249~252쪽